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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d Impact

텀블러



텀블러에 올려둔 예전 사진들을 들여다 보았다 D가 살던 오피스텔엔 한 벽면이 통째로 커다란 창문이었는데 블라인드를 아무리 내려도 꼭 빛이 들이닥쳐서 자다가도 몇 번 씩 깼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미술을 했었는지 찬장 구석에 바디크레용이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몸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정체모를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는 내 몸에 자기 이름을 몇 번 씩 적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냈다 그리고 씻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
그의 몸은 마르고 탄탄했다 항상 열여덟의 소년처럼 보였다 작지 않은 키에 비해 좀처럼 살이 찌질 않아서 해 먹일 수 있는 건 죄다 만들어줬었다 같은 건물에 삼계탕집이 있었는데 우린 꼭 일인분을 포장해와서 뼈를 발라내고 닭죽을 끓여먹었다 입이 짧던 그가 이건 깨끗이 비워냈다 외출을 싫어하던 나는 그가 나가자 보챌 때마다 짜증부터 냈었는데 막상 나가면 서로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벽까지 미니카를 조종하거나 자전거를 탔다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땐 각종 거짓말을 셋트로 만들어서 써 먹었다 밤새도록 떠들다가 보면 어느새 아침이었고 나는 돌아가지 않고 종종 그의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 대학원 막학기여서 머리는 복잡했지만 시간은 한가했다 출근을 준비하는 그를 돕는 게 좋았다 그가 아침을 거르는 게 싫어서 참기름과 간장, 달걀에 밥을 볶아 김을 말아 입에 넣어주었다 가끔 도시락도 싸 주었는데 너무 깨끗이 비우는 게 수상해서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너 이거 안 먹고 버렸지?' 그는 깔깔 웃으며 아니라고 잡아뗐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그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 거였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내 허리를 감싸안고 이마를 내 배에 기대고서는 별 말도 없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이건 신호였다 나는 드라이어를 키고 그의 머리를 털어냈다 가끔 그는 꾸벅꾸벅 졸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턱을 받치고 나머지를 말렸다 아이를 키우는 것 같기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입으란 옷들을 불평없이 척척 입긴 했지만 양말만은 꼭 자기가 골랐다 그는 양말을 모으는 걸 즐겼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온기가 짙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었지 난 그 이후 만남에 실패할 때마다 그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모든 감정에 겸허해진다

먼 타국에서 이유없이 계속 말라갔을 때 그가 구워준 스테이크 덕분에 목숨 붙이고 살 수 있었다 아, 미트소스 스파게티도
그는 시판 소스를 쓰는 대신 생토마토 캔에 간 고기를 넣고 직접 소금 후추 간을 했다 그건 정말 맛있었다 정말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 요리사가 될 줄 알았는데 의사가 되었네

언젠가 한국에 잠시 들른 그를 다시 만났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었다 봐봐, 내가 없으니까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얼마나 좋아 홍콩에 태국에 유럽에 신났겠네 부러워 내 말을 잠자코 듣던 그가 대답했다 같이 있었으면 함께 갔겠지

그가 했었던 우리와 함께라는 말은
아직도 나를 휘청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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